도덕경에서 '무위'의 본질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마찰력 없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점, 묘하게 섬뜩하다. 자연(道)에는 선악이 없고, 사회적 '악'으로 분류되는 파괴적 행위라도 그것이 시대의 중력에 순응하는 결과라면, 철저히 무위에 속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귀한 분들로부터 주옥같은 이야기를 주워담을수록,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확인한다... 어른이 되면 ‘직업’이라는걸 가져야 한다는걸 알기도 전에 옷에 빠져버렸고, 이 일을 ‘선택했다’고도 할 수 없는 시절부터 마냥 즐겨 온 탓에, 지금은 다른 선택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날의 검과도 같은 애정의 관성... AI가 모든 직업을 대체할거라는 위협에도 전혀 겁이 나지 않는다. 내 최후의 고객이 나 자신인 한,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도 뭔가를 만드는 일은 절대 못 놓을 것 같다. 옷을 다루지 못하게 된다면 평생 그리워할테고.
열 살 즈음, 단종의 유배지에 간 적이 있다. 그것도 여러번. 부모님께서 '여기가 단종이 걸터앉아 놀던 나무다'라고 말씀하셨던 장면도 기억난다. 조선의 수많은 왕들을 몰랐던 시절 '단종'이라는 왕을 알았고, 그 친근감을 쌓은 곳이 그의 유배지라는게 지금 생각해도 참 묘하다.
중학교에 진학해 국사를 공부할 때, 단종이 '스쳐간' 연표를 보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여전하다. 한국의 변방에서 자란 나에게 수많은 '유배지'가 친근했고, 장군들이 싸우다 스러져간 반도의 모서리, '바다'가 익숙했다. 만약 내가 수도에서 태어났다면, 변두리의 삶들에 마음을 두지 못했을까.
나는 유배지와도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한 번도 수도였던 적이 없는 머나먼 동네에서, '유배流配'라는 단어의 '흐를 류流'자를 보고는 낭만적이라며 마냥 좋아했었다. 어딘가에서 시작된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곳 까지 누군가가 흘러 왔고, 그 곳에서 자연과 함께 했다는 옛 이야기가, 지금도 여전히 좋다. 누군가는 그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지만, 어차피 위대한 장군들이 이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해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어차피 사람은 강처럼 흘러 죽음이라는 바다로 나아가니, 그 전에 잠깐 머물러서 쉬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은가.
'이 곳에서 성대한 번영을 이루었다'는 기록보다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더 많은 유배의 땅,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
의상이 특정 스케일 이하로 작아지면 '재봉의 흔적'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내가 생각하는 의상제작 방법은 약 세 가지가 있다.
1. 접착제 등의 약품사용(원단소재 살리고 싶은 경우)
2. 가죽 등 재봉이 필요없고 성형이 가능한 의류용 소재 사용
3. 점토나 3D프린팅 등 면재 성형이 아닌 면재를 만들 수 있는 소재 사용
옷덕후의 입장에선 소재의 자연적 질감을 포기할 수 없어 1, 2를 선호하는데, 재료의 선택지가 너무 많고 테스트와 시행착오가 필수적이며, 1번의 경우 성형용 약품을 재료 맞춤형(?)으로 조합해야 한다. 점토가 가장 간단하지만 사실적 질감을 포기해야 하며, 3D 프린팅은 가장 이상적 형태를 구현하기 쉬우나 유연성과 두께 이슈가 있다.
AI를 본업보다 덕질용으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든 원하는 결과물- 방향성과 퀄리티의 레벨-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적어도 AI는 '딸깍'툴이 될 수가 없다. AI툴은 입력한 언어값을 시각자료로 변환하는 기술자이자 통역가에 가깝다. 프롬프트라는 명령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으며, 이 '명령'에는 '알아서 잘'과 같은 '인간 신입이었다면 적당히 먹혔을 것'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을 썼을 때 세세하게 언어화하지 않았던 것까지 전부 언어화할 수 있는가? 가 AI툴 사용자에게 중요한 이슈가 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의 방향성-컨셉과 색채, 형태, 공간, 오브제, 사건, 감정 등을 언어로 정밀하게 풀어 쓸 능력이 있는가?' 물론 GPT와 같은 LLM을 사용해서 '적당히 잘, 혹은 예쁜 것' 등을 명령해 프롬프트를 생성할 수 있지만, 평이하고 단순한 언어는 누구나 뽑는 적당한 양산형을 출력한다. LLM의 '적당히 예쁜 것'은 곧 '어디서 본 듯한 평균'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디자인의 정수는 평균에서 벗어난 '의외성'에 있으며, 이를 끌어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고유한 미적 편향과 그것을 구현할 디자이너의 프롬프트 사용 능력이다. 그럼에도 만약, 디자이너가-혹은 예술가가 사라질거라 생각한다면 아래 경우에 포함될 것이다.
* 평균값의 결과물로 만족한다.
* 원하는 컨셉이나 컨텐츠의 방향이 뚜렷하지 않다.
* 시간과 비용을 들여 퀄리티를 높이기보다, '거슬리지 않는 것'을 빠르게 생성하는 게 중요하다.
. . . . .
하지만 한편으론 생각한다. AGI에 준하는 '초월 번역가'가 출현한다면, 이 디자이너의 역량 또한 일시적인 요구값일지도 모른다고...
도덕경에서 '무위'의 본질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마찰력 없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점, 묘하게 섬뜩하다. 자연(道)에는 선악이 없고, 사회적 '악'으로 분류되는 파괴적 행위라도 그것이 시대의 중력에 순응하는 결과라면, 철저히 무위에 속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무자비할만큼 건조하다.
밤늦게 집에 귀가할때마다 혼자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때 아무도 없다는것,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것이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이자 평화다...
귀한 분들로부터 주옥같은 이야기를 주워담을수록,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확인한다... 어른이 되면 ‘직업’이라는걸 가져야 한다는걸 알기도 전에 옷에 빠져버렸고, 이 일을 ‘선택했다’고도 할 수 없는 시절부터 마냥 즐겨 온 탓에, 지금은 다른 선택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날의 검과도 같은 애정의 관성...
AI가 모든 직업을 대체할거라는 위협에도 전혀 겁이 나지 않는다. 내 최후의 고객이 나 자신인 한,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도 뭔가를 만드는 일은 절대 못 놓을 것 같다. 옷을 다루지 못하게 된다면 평생 그리워할테고.
내가 입을 의상을 직접 만드는 경우는 오로지 코스프레용 의상을 제작할 때 뿐인데, 덕분에 코스프레용 의상이 그 어떤 일상복보다 내 옷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이 인물을, 이 색과 소재를, 이 분위기를, 이 디자인을 선택했는지를 한 벌에 다 담아두었기 때문에.
의상이 내 서사와도 같다.
지금 작업중인 의상을 만들면서 2018년의 경험을 떠올렸다. 문스독의 다자이 의상을 만들면서 왜 ‘완벽하게 매끄럽지 않은’, 결이 있는 원석을 선택했는지를.. 자연의 우연성을 어떻게라도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균일한 색을 지닌 아이템들의 틈에서.
귀멸의 칼날의 기유 의상을 만들 때, 하오리의 반쪽 - 와인색이 반드시 빛을 반쯤 머금은 검붉은 색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양 쪽이 극단의 대비를 이루어야만 ‘두 사람의 삶’을 짊어진다는 의상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스토리가 있는’옷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고, 코스프레를 한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라 내내 최애를 향한 애정을 의상으로 번역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너무 즐겁다. 그렇게 옷만 만들고 촬영을 안한 것도 있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열 살 즈음, 단종의 유배지에 간 적이 있다. 그것도 여러번. 부모님께서 '여기가 단종이 걸터앉아 놀던 나무다'라고 말씀하셨던 장면도 기억난다. 조선의 수많은 왕들을 몰랐던 시절 '단종'이라는 왕을 알았고, 그 친근감을 쌓은 곳이 그의 유배지라는게 지금 생각해도 참 묘하다.
중학교에 진학해 국사를 공부할 때, 단종이 '스쳐간' 연표를 보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여전하다. 한국의 변방에서 자란 나에게 수많은 '유배지'가 친근했고, 장군들이 싸우다 스러져간 반도의 모서리, '바다'가 익숙했다. 만약 내가 수도에서 태어났다면, 변두리의 삶들에 마음을 두지 못했을까.
나는 유배지와도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한 번도 수도였던 적이 없는 머나먼 동네에서, '유배流配'라는 단어의 '흐를 류流'자를 보고는 낭만적이라며 마냥 좋아했었다. 어딘가에서 시작된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곳 까지 누군가가 흘러 왔고, 그 곳에서 자연과 함께 했다는 옛 이야기가, 지금도 여전히 좋다. 누군가는 그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지만, 어차피 위대한 장군들이 이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해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어차피 사람은 강처럼 흘러 죽음이라는 바다로 나아가니, 그 전에 잠깐 머물러서 쉬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은가.
'이 곳에서 성대한 번영을 이루었다'는 기록보다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더 많은
유배의 땅,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
의상이 특정 스케일 이하로 작아지면 '재봉의 흔적'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내가 생각하는 의상제작 방법은 약 세 가지가 있다.
1. 접착제 등의 약품사용(원단소재 살리고 싶은 경우)
2. 가죽 등 재봉이 필요없고 성형이 가능한 의류용 소재 사용
3. 점토나 3D프린팅 등 면재 성형이 아닌 면재를 만들 수 있는 소재 사용
옷덕후의 입장에선 소재의 자연적 질감을 포기할 수 없어 1, 2를 선호하는데, 재료의 선택지가 너무 많고 테스트와 시행착오가 필수적이며, 1번의 경우 성형용 약품을 재료 맞춤형(?)으로 조합해야 한다. 점토가 가장 간단하지만 사실적 질감을 포기해야 하며, 3D 프린팅은 가장 이상적 형태를 구현하기 쉬우나 유연성과 두께 이슈가 있다.
어느 쪽도 쉽지가 않다..
AI를 본업보다 덕질용으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든 원하는 결과물- 방향성과 퀄리티의 레벨-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적어도 AI는 '딸깍'툴이 될 수가 없다. AI툴은 입력한 언어값을 시각자료로 변환하는 기술자이자 통역가에 가깝다. 프롬프트라는 명령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으며, 이 '명령'에는 '알아서 잘'과 같은 '인간 신입이었다면 적당히 먹혔을 것'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을 썼을 때 세세하게 언어화하지 않았던 것까지 전부 언어화할 수 있는가? 가 AI툴 사용자에게 중요한 이슈가 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의 방향성-컨셉과 색채, 형태, 공간, 오브제, 사건, 감정 등을 언어로 정밀하게 풀어 쓸 능력이 있는가?' 물론 GPT와 같은 LLM을 사용해서 '적당히 잘, 혹은 예쁜 것' 등을 명령해 프롬프트를 생성할 수 있지만, 평이하고 단순한 언어는 누구나 뽑는 적당한 양산형을 출력한다. LLM의 '적당히 예쁜 것'은 곧 '어디서 본 듯한 평균'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디자인의 정수는 평균에서 벗어난 '의외성'에 있으며, 이를 끌어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고유한 미적 편향과 그것을 구현할 디자이너의 프롬프트 사용 능력이다. 그럼에도 만약, 디자이너가-혹은 예술가가 사라질거라 생각한다면 아래 경우에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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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편으론 생각한다. AGI에 준하는 '초월 번역가'가 출현한다면, 이 디자이너의 역량 또한 일시적인 요구값일지도 모른다고...